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 배추를 씻고 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녘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녘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란 구절을 처음 대했던 것은 대학교 때 좋아하던 '안도현'의 시집 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푸르던 젊은 날에 나는 무슨 억한 심정을 가져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감정에 동요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난 뒤에 생각해보면,
어렴풋하게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산다는 것이 본래가
내 삶이 본래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 아닐런지요.

요즘의 내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고요하고, 조용하고, 적당히 고독한'


파란 하늘에서 한 방울 또오옥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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