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문학동네

  현대 문학이 리얼리즘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요즘 나오는 소설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판타지에 가깝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어찌보면,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하고,
  그냥 잡스러운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담겨 있는 것 같지만 전에 읽었던 작품들 만큼 깊이가 없는 것 같은 모양새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더 이상 현실과 판타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에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미 가상현실이라는 사이버 세상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고,
  과거 공상과학이라는 이름아래 미래를 전망하던 소설들은 이미 공상과학이 아닌 현실이 되어 있기 때문에 공상과학이라는 말, 가상현실이라는 말은 실현불가능한 명제에서 현존하는 명제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
  김영하의 등단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거의 처음으로 판타지와 소설의 경계를 허문 작품으로 평가 되어 왔다.
하도 김영하를 극찬하는 말들이 많아서, 극찬 뒤엔 극실망하는 적이 많았던 본인인지라,  12년이나 지난 이제야 와서 소설을 펼쳐보게 되었다.

  그간 김영하는 활발한 저작활동을 통해서 비범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해왔고 그 때마다 평도 그리 나쁘지 않았었다고 기억된다. 더군다다 그의 작품이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소설로 뽑혀 프랑스 등지에 번역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의 능력은 상당히 인정 받은 셈이지만, 기대뒤의 실망이 두려운 나는 계속 외면해왔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된 듯.
  요번에 새로 개정되어 나온 그의 책은 세 편의 그림과 함께 시작한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마라의 죽음, 1793, 캔버스에 유채, 165×128cm, 브뤼셀, 왕립 미술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언젠가 예술의전당에서 진품을 접한 적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고,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1>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1 Judith1> 캔버스에 유채 84x42cm,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클림트의 "유디트1" 이 역시 너무나 좋아라 하고 유명하기도 한 작품.
  클림트의 애인이었던 여자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의 모습에서 원초적 아름다움과 죽음의 모습을 모두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사람은 아름다운 순간에 죽음을 생각한다 하지 않던가?


들라크루아 <격노한 메데이아>

<격노한 메데이아 Médée furieuse> 캔버스에 유채,파리 루브르박물관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의 죽음>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사르다나팔의 죽음 The Abduction of Rebecca> 캔버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박물관


  마지막 으로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의 죽음".
  들라크루아는 루브르 박물관 전에서 <격노한 메데이아>란 작품이 인상 깊게 남아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 사람은 <민중을 이끄는 승리의 여신>과 같은 미술책에도 나오는 작품을 남긴 아주 유명한 낭만파 작가였다.

  여튼,
  모든 그림들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이 소설 또한 자살을 도와주는 사람이 주인공인 소설이므로 아주 유효적절한데,

  첫 번째 다비드의 그림은 살해당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살해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춰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공의 살인에 대한 생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겠고,
  두 번째 클림트의 그림은 죽음의 아름다움과 죽음으로서 완성되는 아름다움의 한 측면을 들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주인공의 살인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
  마지막 그림에서는 죽음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사르다나팔, 더군다나 그 죽음의 향연을 지시한 사람으로써 죽음을 관장하는 사람의 담담하지만 냉철한 내면의 모습을 들어 주인공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내용이 짧아 줄거리를 이야기하다 보면 책을 읽은 것과 같아 내용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못하겠고,
  (시간 내서 읽어보시라. 2시간이면 충분할 정도다.)

  아무튼, 이 소설이 나온 뒤 우연찮게도  "자살사이트"와 같은 사회적문제들이 발생하고, 판타지 문학과 같은 소설들이 기세를 떨쳐 김영하의 등단작은 말 그대로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이 되고 말았고, 스스로 작가 후기에서 말하기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설을 쓰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상당히 치밀한 계산과 각본에 의해 쓰여진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짧고, 내용 자체에 덜어낼 것이라곤 없는 것 같아, 작가가 개정판을 손질하려다 "하나를 고치면 전부를 다시 써야 할 것 같았다."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 그의 소설을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조심스럽게 권유해본다.

Trackback Address >> http://cha2.co.kr/trackback/9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실버제로 2010/02/25 05:0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걸 읽으니 더 기대되는 걸요^^
    여기에 있으니 한국어의 퇴보가 문제입니다.
    단어 선택이 이상해져서 아주 문제이지요...ㅋㅋ

    한국현대소설... 혹시 또 괜찮은 소설 알고 계신지요?
    재작년에 친구한테 보내달라고 해서 책을 읽었는데 실망했었거든요.
    정말 말도 안되는 작품들도 많은것 같아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