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으러 집을 나섰습니다.
  밥을 해먹을 수도 있었지만, 오늘 하루 종일 집에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겆이하고, 책정리하고.... 했더니, 왠지 한 번 나갔다가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야겠고, 아침 대신 먹고다니는 우유, 바나나, 닥터유 통밀케이크 도 떨어져서 부랴부랴 길을 나섰죠.
  마트에 들러서 드라이크리닝할 옷들을 맡기고, 식품관으로 내려갔습니다.
  마음이 좀 급했어요. 배가 고픈 것도 고픈 거지만, 일요일 마트는 일주일치 장을 보러 나온 저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요. 오늘은 특히 심했습니다.
  보통, 출입하기 편리한 2층 옥외 주차장은 당연히 만원이어서 진입도 못하고, 4층 주차장까지는 차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래도 왠만해선 6층 주차장까지 가는 일은 없는데, 오늘은 6층까지 보내더라구요.ㅠ
  좀 일찌감치 움직였더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텐데 또 게으름을 피우다 마지못하여 길을 나선 제 자신을 자책하며 차를 대고 옷을 맡기고 그렇게 내려온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어느 층보다 식품관이 있는 1층이 가장 붐비었죠.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서 구입하고 밥먹으러 가야지..하는 생각에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피해서 우유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제가 먹는 우유는 수시로 바뀌긴 하지만 그래도 요새는 '파스퇴르 무지방 우유'를 먹고 있지요. 몇 백원 비싸긴 한데, 왠지 먹을 것에까지 돈을 아껴서 무슨 소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서울우유'를 비교하다가 결국은 '파스퇴르'를 집었습니다. 진짜 좋은지 어떤지는 모르지만요...
  여튼, 그 다음은 거리상 제일 가까이에 있는 과자류 코너였는데, 마침 옆에 반찬코너가 보이더라구요.

  '아..콩자반도 떨어졌고, 무말랭이도 떨어졌으니, 한 번 사긴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반찬을 골랐어요.

  한 200g 남짓한 일회용 팩에 담긴 반찬들이 3팩에 만원...
  이것은 싼지 비싼지 따질 수가 없었어요. 저는 콩자반이랑 무말랭이를 만들 순 없으니까..
  그나마 집에서 밥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니까, 이렇게 한 번 구입하면 1~2주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기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반찬을 고르고 아주머니가 포장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로 뭔가 이상한 기운이 쏴~악 느껴지는게 아니겠어요?
  분명히 익숙한 느낌이긴 한데, 너무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것이라 '어 이게 뭐지'라는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그 기운이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습니다.

  한 2미터 쯤 떨어져있었나.
  마트 반찬코너에 가면, 조금씩 맛을 보라고 여러 가지 반찬을 조금씩 덜어놓은 시식코너가 있잖습니까?
  그 시식코너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무언가 굉장히 신중한 눈으로 반찬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죠.

  '아..이거였던가? 오랫만이네..이런 느낌이었던 것이구나?'

  처음에는 잘 몰랐던 것을 어느 순간 갑자기 확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잘 안풀리는 퍼즐을 한참이나 끙끙대며 맞추고 있다가 갑자기 해법이 머리 속에 쫙 그려지면서 순식간에 맞춰버리는 그 때의 그 느낌이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에게 꽂힌 것이었지요.
  그리고 저는 그런 순수한 호감 같은 것을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연애감이 떨어졌다는 둥, 이제 이성적인 연애를 하고 싶다는 둥 했던 것입니다.
  이제야 앞으로 걸어가야할 내 연애의 앞 길이 또렷히 보이는 것 같았죠.

 여튼, 뒤이어 이런 생각이 함께 들었습니다.

  '야.. 괜찮네, 참 예쁘네, 머리 스타일도 딱 좋고.. 우와.. 파마도 잘어울리잖아.. 청바지를 입었네? 거기에 운동화? 운동화? 나이가 어린가? 얼마나 되었을까? 20대 초반? 에이.. 안되는데...'

  도대체 안되긴 뭐가 안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식코너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이쑤시개 하나를 가만히 들어서 반찬을 콕 찍어 입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 쯤, 반찬 코너 아주머니가 포장된 반찬들을 건네 주셨죠.

  '고..고맙습니다.'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과자코너로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는 동안, 온갖 생각들이 머리 속을 지나가더군요.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느낌이라 왠지, 아무도 모르는 제 속마음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창피하였습니다.
  결국엔 얼굴도 달아오르고 뒤를 돌아보지 못하겠더군요.. 귀까지 빨개졌어요..

  '아, 얼마 만에 느껴보는 부끄러움이냐..도대체...'

  그러면서, 한 편으론 마음이 매우 즐거워졌습니다.
  저에겐 이런 순수한 감정이 안 남아 있는 줄 알았거든요.
  제가 지금 이 나이 먹고 그 사람을 쫓아가서 번호를 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봐도 10살 내외의 나이차이가 있을 것도 같은데 안될 것도 알지만(정확하진 않아요.. 비슷한 나이일 수도..), 누군가를 처음 딱 보고 순간이나마 마음을 쏙 빼앗겨버리는 이런 철부지 소녀와 같은 감정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원래, 대학교 때에는 이런 안테나가 잘 발달해 있어서, 평소 괜찮게 생각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이 지나가면 알아서 머리가 돌아가곤 했는데 말이죠...어느 샌가 연애를 돌 보듯 하다 보니, 그런 감정들이 다 없어졌는 줄 알았습니다.

  음.. 아직 죽지 않았네요. 저.. 연애할 수 있겠는데요?
  이제 그렇게 필이 꽂히는 사람만 나타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ㅎㅎㅎ

  여튼, 어떤 감정인지 다시 감각이 살아 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테나를 좀더 활성화시켜야 겠어요.. ㅋㅋ

  내일부턴 시험기간입니다.
  전처럼 여유로운 시험기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충도 없고, 야자도 없으니까.. 좀 여유롭겠네요.

  읽고 있는 <불안>은 역시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좋은 책입니다.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여유있는 시간을 맞이하여 '이적'의 새앨범과 '재주소년'의 새앨범을 주문했습니다. 둘다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또 한 주의 시작이네요.
  힘들지만, 감성도 풍부해지시고, 책도 많이 읽으시고, 풍요롭게 많은 것들을 얻으시는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이상, 철부지 '차이와 결여'였습니다. : D

  덧붙임 : 아무래도 혼자 온 것 같았는데, 마트에 혼자 와서 반찬코너에서 시식을 할 상황이면 나이가 꽤 있지 않을까요? 그 분? 차를 타고 왔으면 직장인... 아닌가, 걸어 왔을 수도 있나???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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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10/04 21:4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차이와결여 2010/10/04 22:32  address  modify / delete

      '촉'이 뭐야 '촉'이.. 무슨 강장동물, 말미잘, 불가사리.. 이런 거 같잖아..ㅎㅎㅎㅎ

      뺏기지 않을 테다..ㅎㅎㅎ

  2. 성* 2010/10/06 10:4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결혼한 여자도 티비에서 나온 초코렛 복근만 봐도 가슴 떨리는데 하물며 오빠가 그랬다는 건
    지극히 정상이지요...
    그 마음 다시 한번 생길 날이 또 오거든 그땐 부끄러워 마시고 용기내세요. 아자!!!

    • 차이와결여 2010/10/06 20:58  address  modify / delete

      음...

      초콜릿 복근에 가슴이 떨리는구나..

      난 요새 벗은 아가씨를 봐도 반응이 없는데 말야. ㅎㅎㅎㅎ

      알겠습니다요. 다시 그 아가씨를 만나면 고백해야지..ㅋㅋ

      근데, 얼굴이 기억이 안나요. 이미지만 남았어..ㅠㅠ

  3. clovis 2010/10/06 17:5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얼른 잡으세요!!!!!!!! 필이 올때 잡으셔야합니다..

  4. clovis 2010/10/06 17:5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얼른 잡으세요!!!!!!!! 필이 올때 잡으셔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