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 2008년 08월 03일 08시 10분
Where : 미로스페이스 (광화문)
(★★★★)
계속 나를 피해가기만 하던 토니 타키타니를 만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꼭 보아야 했던 영화인데, 소리소문 없이 개봉했다가 지나간 뒤에 아쉬워했었고, 예매를 했더니 병이 나버리는 그런 인연이 닿지 않던 영화였다.
뭐 암튼 이번에도 시간 계산을 잘못하여
미로스페이스 바로 앞에 있는 씨네큐브에서 "록키 호러 픽쳐 쇼"를 먼저 예매했었는데, 그 영화가 끝나는 시간이 "토니 타키타니"의 시작시간과 정확히 1분도 틀리지 않고 똑같아 볼까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횡단보도도 없는 그 길을 무단횡단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보게된 영화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모음집 "렉싱턴의 유령"에 실려 있는 "토니 타키타니"라는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혼자 외롭게 생활을 하던 "토니 타키타니"는 우연히 옷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잘 입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와 홀리 듯 결혼하게 된다. 그 여자에게는 옷과 신발과 같은 것들을 병적으로 사 모으는 습관이 있었는데, 급작스럽게 그 여자가 교통사고로 죽게된 후, 아내와 똑같은 칫수를 가진 가정부를 고용하게 된다는... 후반부가 더 있지만 스토리는 여기까지...
영화는 처음부터 나레이션으로 시작을 하는데,
그 나레이션은 따로 각본을 만든 것이 아닌 겨우 각색을 통해 불필요한 부분만을 제외한 하루키의 소설 지문 그대로였다.
"토니 타키타니의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
특이한 것은, 그런 나레이션을 영화 밖의 나레이터만이 읽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의 인물들이 이어받아 주는 형태
예를 들어,
"토니 타키타니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매일 방에 틀어박혀 혼자서 그림만 그렸다."
라는 나레이션이 있다고 하면,
나레이터는 "토니 타키타니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매일 방에 틀어박혀" 까지 나레이션을 하고 영화 속 등장인물이 "혼자서 그림만 그렸다." 라는 식으로 이어받는 형식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소설의 서술자가 이야기를 진행하면 독자들은 머리 속으로 그 장면을 연상하면서 그리게 되는 소설의 독해과정을 영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데,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저렇게 나레이터와 등장인물이 서술방식을 이어감으로 해서, 관객들은 소설의 서술자와 등장인물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소설의 한 구성요소임을 무의식중에 파악하듯, 나레이터와 등장인물이 별개의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뭉쳐져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소설의 스토리텔링의 기술적 방법을 영화에 그대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끊임없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스크롤되듯 카메라 테이킹을 통해서 장면을 전환시키는 데, 이것 또한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책장을 넘기며 잃는 방식, 더군다나 일본에서는 책을 우에서 좌로 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방식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말을 빌려보자면, 감독은 이 소설에 짙게 깔린 고독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필름을 탈색시켜 가며 현상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시작부터 푸른 빛이 도는 회색톤이 가득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고, 거기에 더해지는 나레이션, 게다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토니 타키타니"의 모습.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선율까지... 그야말로 하루키 문학을 어떻게 하면 영상으로 제대로 옮길 수 있는지에만 신경쓰고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을 찾아보자면,
소설에서는 아내가 단순히 교통사고로 죽는 것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분명히 차를 다시 유턴하다가 사고가 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고,
소설에 없는 아내의 옛 애인의 등장,
그리고 결말의 처리 방식인 것 같다.
아무튼,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하루키의 소설에 담겨있는 고독과 외로움의 깊이를 영상을 통해서 얼마만큼이나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 같은 영화인데,
그런 영화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남자주인공을 맡은 "잇세이 오가타"는 하루키와 너무나도 닮아 있고, 또 그만큼 고독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여자주인공을 맡은 "미야자와 리에"도 연기를 깔끔하게 잘해주고 있어서 보고 난 뒤에 생각할 것을 많이 던져주는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아직 상영이 끝나지가 않아서 주말쯤 한 번의 상영이 더 남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보고서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니 꼭들 봐주시길 바란다.
덧붙임 :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미야자와 리에만 1인 2역을 한게 아니라,
남자 배우 "잇세이 오가타"도 토니타키타니와, 쇼자부로 타키타니(아버지) 역을
1인 2역 했더군요.... 나만 몰랐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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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토니 타키타니 (トニー滝谷, 2004)
Tracked from Different Tastes™ Ltd. 2008/08/10 00:25 delete무라카미 하루키의 '힛트 소설'들은 왜 영화화되지 않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정확한 속사정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조금이라도 흥행에 도움이 된다면 물불을 안가리는 영화 장사치들이 하루키에게 영화 판권을 사겠다는 제안을 안했을리는 없고, 결국 하루키의 작품들이 이제껏 영상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하루키가 그것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만 했다. 그럼 하루키가 자기 작품들의 영화화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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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영상 소설을 써보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 같고 성과도 있었던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흔히 영화화의 과정에서 사라지는 문학적인 특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할까요.
무단 횡단까지... 저는 가끔 밥도 못먹고 상영시간에 맞춰 뛰는 저 자신을 볼 때
영화 한 편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좀처럼 멈출 수가 없네요. ^^
네. 저도 그 점이 참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흥분했더랬죠.. ^^
어제는 시간 계산 잘못해서 뛰지도 못하고 밥도 못먹고 놓쳐버린 시간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더랬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렇게 날아갔어요..흑흑...
저도 비디오로 밖에 못보긴 했지만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면
밥 굶고 뛰는 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조만간 보실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잡으시길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