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무척 많이 되었던 시간.

'고은'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점은,
다작이라는 말로는 표현할수도 없을 만큼 끊임없이 시를 창작해오시면서도,
평작 이상의 작품의 질을 보여주시는 그 힘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외국 작가는 잘 몰라서 확인하진 못했지만,
우리 문인들 가운데 그만큼의 방대한 저작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시던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반가운 후배와 만나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강의실로 향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작가 '사인회'가 시작되지 않고 있었고,
7시가 다 되어서야 '고은'선생님께서 강의실로 들어오셨다.
이윽고 시작된 작가 '사인회'.
명성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연단으로 와서 부득이 인원을 제한 할 수밖에 없다는 주최측의 설명.

선생님께서는 사인을 받으러 나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시고,
등을 두드려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같이 사진을 찍자하면 찍어주시고 하는 터라 시간은 더 오래 지체 되었지만,
다정하신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이윽고 시작된 강좌.
먼저 감상을 이야기 하자면,
이전 두 분 시인들의 강좌가 나름대로 알찬 강좌였지만, '문학 강좌'라는 규격에 맞춰진 성격이 강했던 데 반해
선생님의 강좌는 말 그대로, '시인의 강좌', '무형식의 강좌'라는 개념이 강했다.

"나는 오늘 너희의 가슴을 아프게 하려고 왔어. 문학 이야기 하려고 온게 아니야. 나 평범한 사람 아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강좌의 성격을 정의해주셨고,
당신께서 어떻게 시인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선생님이 태어나신 때는 일제말기, 태어날 때부터,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나신 후,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우고, 국민학교에 입학해서도 일본어로 쓰여진 책으로 일본어를 통해 공부를 하셨는데, 해방이 되고 중학교에 들어간 뒤, 한글로 된 국어교과서를 받아보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선생님이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이순신이라는 사람을 기억해라.'라는 말씀을 하셨을 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줄 몰랐지만, 그제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고, 정체성을 찾으셨다고 했다.
그 때, 국어교과서에 소설이며 시며 논설문이며 많은 글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 책에서 처음으로 접하신 시가 '이육사'의 <광야> 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직접준비해오신 <광야>를 낭송해주셨는데,
선생님의 모든 문학인생이 다 들어가있는 듯한
낮고 강렬한 저음이 높아지다 낮아지고 몰아치다 잦아드는 그 음성이 정말 감명깊어서,
시를 낭송한다는 것이 저렇게 멋있다는 걸 난생 처음 알게되었다.

이어서 그 <광야>라는 시에 담긴 세 가지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까마득한 날'이라는 말에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커다란 시간이,
'광야'라는 말에 우리는 표현하지 못할 커다란 공간이,
'초인'이라는 말에 누구도 보지 못한 커다란 인간
그 모두가 한 편의 시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느끼고는

시의 언어가 막 살아서 밀물처럼, 바람처럼, 산맥처럼 당신께 달려오는 느낌에 언어의 주술성을 느끼시게 되었고, '너무 무서웠다'고  첫 느낌을 말씀해주셨다.

나도 평소, <광야>를 읽으면서, 이 짧은 시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이 무엇인지 느낌으로만 알고 표현하지 못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그 느낌의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고,
시를 읽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강좌의 제목인 '열정'이라는 말을 가리키시면서

당신이야 말로 평생을 '열정'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밥을 먹을 때도 열정적으로 먹어야하고, 숨을 쉴 때도 열정적으로 쉬어야 하고,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열정적이어야 한다고, 죽을 때도 열정적으로 죽어야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깊이 공감
했다.

또한,
강연하시는 동안 매우 큰 제스처와 함께 말씀에 힘이 묻어나는 강좌를 보여주셨는데, 간혹 말씀이 잦아들 땐 잘 들리지가 않아 답답했다.

준비된 생수을 드시다가, '이건 가짜 물'이라고 하시면서 '소주'를 주문하신 선생님.
한 분이 나가서 '소주'를 준비해오자,
컵에 '소주'를 따라 드시면서 강의를 하셨다.

'이건 이벤트가 아니야, 나 이벤트 같은 거 하러 온거 아냐.  내가 가진 진실함과 너희가 가진 영혼과 만나러 온거야.'
라는 말씀과 함께 '이육사'의 옥살이를 말씀하실 땐,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도 훔치시며 열정적으로 강연해주신 선생님의 모습에,
진정한 시인의 모습, 진정한 先者의 모습, 진정한 賢者의 모습을 보았다.

짧은 질문의 시간을 통해,

"모든 시인에게는 결핍이 있고, 그 결핍에 의해 시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께서 가진 결핍은 무엇이며, 결핍이 아니더라도 시를 창작하시는데 동인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라는 질문에,

"나에겐 결핍이 없는 게, 결핍이야. 무슨 말인지들 알겠니? 가만히 생각해봐."

라고 답하시는 모습.
평범한 사람이 말했더라면 상당히 무례한 이야기였겠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매우 감명 깊은 강좌.
오래 오래 곁에 있어 주세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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