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열정문학강좌에 다녀왔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요.

  본래, 김용택 시인이 오는 줄 알고 갔는데, 갔더니 안도현 시인이더군요.
  안도현 시인의 <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두 시집을 끼고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한동안 외도를 하시는 것 같아서 외면하고 있었드랬죠.
  근데 막상 강연을 듣고 보니, 천상 시인이셨습니다.

  몇 편의 시를 직접 낭독해주셨는데,
  왜인지 몰라도, '길어서 졸 수도 있다'고 했던 이 시만 박수가 나왔습니다.
  저도 눈 감고 들었는데, 좋더라구요..
  그래서 시집을 새로 사고, 읽어봤는데, 아무래도 이 시는 낭독할 때 참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창피하지만 직접 낭독을 해봤어요.
  들으시면서 함께 읽어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매일 시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막상 맘 먹고 낭독하려니 어색하군요.
  듣고 욕하지만 말아주세요 ^^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건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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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10/15 14:5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차이와결여 2010/10/15 15:52  address  modify / delete

      아하하하.. 부끄럽사와요...

      저는 제 목소리가 이상하기만 합니다. ㅠㅠ
      불쌍한 아이들.. 이러니까 만날 조는 거지...흑..

  2. 카르페디엠 2010/10/15 16:4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랜만에 속삭속삭 라듸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추었네요^^
    오늘은 시 낭독까지..대박입니다~ㅋㅋ
    파도소리가 있는 배경음악을 깔았다면 정말 빨려들 듯 더 매력적인 낭독이 되었을 듯.
    시를 음미하다보니 여행길에 우체국 한 번 들르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다음엔 퇴근을 서두르는 우체국장을 볼모로 잡고 꼭 엽서 몇 장 부쳐야겠습니다.
    이런 시 낭독 코너, 종종 올리세요..까웅 바비!

    • 차이와결여 2010/10/15 21:16  address  modify / delete

      와~~ '카르페디엠'님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
      잘지내고 계셨죠?

      오래간만에 방문하셨는데, 이상한 목소리로 불편을 드리고 다시는 안 오시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ㅋㅋㅋ

      바쁘셔서 그런 것이겠지만, 종종 찾아와서 촌철살인의 말씀 남겨주세요 호호호..

      안보이시면 서운해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

  3. 실버제로 2010/10/15 19:3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시낭독 좋은데요^^

    김영하의 책읽는시간 같아요~~

    • 차이와결여 2010/10/15 21:17  address  modify / delete

      그게.. 팟캐스트인가 뭔가로 하는 건가요?

      아.. 난 한번도 안 들어봐쓴데, 언제 한번 들어보고 벤치마킹 해야겠군요..

      책읽는 시간 좋습니다. ^^

    • 실버제로 2010/10/15 22:16  address  modify / delete

      네네 팟캐스트인데
      자주 듣거든요^^
      여기선 읽고싶은책 마음대로 읽기가 힘드니까요.ㅋ

  4. clovis 2010/10/15 20:2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 ~ 역시 국어선생님이시라서 그런지 목소리 참 좋으시네요...

    • 차이와결여 2010/10/15 21:17  address  modify / delete

      아하하하 그런가요?

      저는 제 목소리가 낯설어서 어색하기만 한데요..

      위에도 이야기 했지만,

      아이들은 졸린 목소리라고 이야기하더군요.. ㅠㅠ

  5. 실버제로 2010/10/16 08:3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목소리가 잠오진 않는데;;;
    애들은 다른 이유로 잠이 오는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