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끝 여자친구

* 김연수, 문학동네

 

  '김연수'의 새로운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 깊지 못해서 '김연수'의 소설적 경향이나, 특징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뒷 부분에 실려 있는 '신형철'의 표현 중에 깊이 공감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왜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대답이 길어지는 게 번거로워 그의 문장이 내 취향에 맞는다고 말하거나, 이 작가가 슬픔에 가까운 감정일수록 돌려 말할 줄 아는 게 좋아서라거나, 그가 세태 관찰과 문화 체험에 의존하기보다는 인문사회과학 공부에 열심인 것이 미더워서라거나, 어떤 크고 차가운 주제도 '사랑'이라는 좁고 따뜻한 층위에서 이야기할 줄 아는 섬세한 겸손함이 마음에 들어서라거나 하는 식으로 그때그때 대답해왔는데.....

(p. 314)

 

 

 

  '신형철'이 정작 이야기하고자하는 부분은 뒤에 이어지지만, 저는 '슬픔에 가까운 감정일수록 돌려 말할 줄 아''김연수', '어떤 크고 차가운 주제도 '사랑'이라는 좁고 따뜻한 층위에서 이야기 할 줄 아''김연수'라는 부분에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여,

  그 때마다 둘러대기 위해서 적당히 선택했던 말이었다고 하더라도요...

 

  여튼,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담겨진 8편의 중 · 단편들을 읽으면서 저는 쉴 새없이 저의 지난 사랑의 모습들을 회상하였고, 그 안에서 웃기도,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으면서는 화자가 '난아'라는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나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을 빌리게 되는데, 그 전까지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에밀졸라'의 소설을  비슷한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결국 대출하고야 마는 귀여운 모습이 맘에 들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대출한 책을 별의미 없이 읽으면서 '내 스물다섯 살의 두번째 계절은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의 책갈피가 넘어가듯이 지나가고 있었다.'라고 읊조리는 장면이 결코 지금의 내 처지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씁쓸함을 느끼게 되었지요.

 

  뭐 여튼, 그렇습니다.

  8편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평온한 삶을 지내다가 어느날 문득,

  혹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사건들을 통해서 인생의 새로운 단면들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지진으로 갈라진 틈 속에 또다른 세상을 만난 것과 같은 느낌으로요..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들인데요.

 

  저는 다른 어려운 것들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순간을 포착해내는, 혹은 명징한 언어로 상황을 정리해내는 '김연수'의 문체가 너무 좋아서 오래간만에 밑줄을 그으면서 책을 읽었답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마치 우리 두 사람은 조금 떨어져 앉은 채 하얀 꽃잎 사이로 이파리가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하는 4월 중순의 벚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게 아닌가는 생각이 들었다........우리는 역설적으로 행복했고, 또 역설적으로 불행했다.

(p. 235 <달로 간 코미디언>)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이제는 '원래 그런 거'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무심히 이야기 할 수 있는,

  열심히 답을 얻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역설적으로 답보다 더 먼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어느 해 4월의 벚꽃이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김연수'는 이야기의 곳곳에 마치 '지난 연애에 네가 한 일을 알고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 기억들을 불러냈고, 저는 무기력하게 그 이야기 속에서 둥둥 떠다니면서 즐겁고도 슬프게 책을 읽었고, 책을 다 읽고 나자, 본래도 좋아하던 작가였지만, 그러한 이유에 의해 이 책은 무한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는 책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와 더불어, '내 삶의 센치멘탈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하는 긴 한숨도 잠깐 쉬었지요.후후.

 

  여튼,

  폭 빠져 읽느라 제대로 읽지를 못해서,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김연수'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역시 강추.

  '김연수'를 잘 모르시는 분이 읽으시더라도 충분히 즐거울 소설입니다.

 

  지금은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으로 좋다는 느낌이지만, 한 번 더 읽고 나면, 손가락을 치켜세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문학동네'에서 이번 디자인은 정말 잘 한 것 같습니다.

  표지 사진은 'Joana Linda'라는 스페인계 여성 사진작가의 <Self-portraits>연작 중 한 편인데요. 너무 아름다워서 다운받아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래 재생지, 혹은 갱지 스타일의 밋밋한 겉표지를 선호하는 스타일인데, 이번 야시시한 분홍색은 표지사진과 함께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선택..

 

  혹시, 하나가 맘에 드니까 모든게 다 이뻐보이는게 아닐런지..(한없이 가벼운 차이와결여)

 

  * Joana Linda Home page : http://www.bright-white-ligh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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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미희 2009/10/15 23:4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읽어봐야겠어요 ^^ '달로 간 코미디언'과 '꾿빠이 이상' 재밌게 읽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