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다 본 '츠바이크'의 소설 <연민>에서 주인공 '호프밀러'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소녀 '에디트'는 그를 향한 격정적인 마음을 참지 못해 먼저 입술을 훔친 후, 자신이 품고 있었던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편지를 16번이나 썼다가 구기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것은 10대 소녀의 열정에 다름 아니고, 나 역시 그런 시간을 지나온 적이 있어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녀는 분명히 이렇게 썼다가 자신의 마음을 너무 많이 보인 것이 아닌가 구기고, 저렇게 썼다가 너무 값싼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 또 구기고, 그렇게 썼다가 너무 튕기고 자존심을 세우는 듯 보일까봐 또 구기고 했을 것이 눈에 보이듯 뻔한 스토리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본래 어설프고, 서툴 수밖에 없는 10대와 20대를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었다. 10대 때에는 20살을 먹고 성인이 된다면 누구에게 기대지않고 나의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지면서 어디에서나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며 나를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퍽이나 맘에 들었지만, 막상 20대가 되고나서도 10대 때에는 생각치도 못했던 경제력이라는 암초를 만나 7~8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의 자력의 삶을 꾸릴 수가 있었다. 그간의 시간은 당연히 이도 저도 아닌,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생활적으로는 미성년인 어중간한 단계에서 수많은 삐걱거림 속에 터덜터덜 걸어왔고, 20대의 끝자락이 저만치 보이는 나이쯤이 되어서는 이 불확실하고 어중간하기만한 세계에서 탈출하는 것은 30대에 서둘러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이 먹는 것을 유쾌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다.

  허나, 30대가 되고 보니, 이제는 앞날 보다는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인데, 30대라는 나이는 또 사회적으로 무언가 손에 쥐어야만 폼이나는 그런 나이였던지라,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내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자신이 손에 쥘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내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던 탓이다.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내가 왔던 길을 돌아보지만 딱히 내가 살아왔던 삶에 불만은 없고, 아마 다시 10대부터 나의 삶을 산다고 해도 지금과 별다르지 않은 길을 걸어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또 구태의연한 나이 이야기를 구구절절히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10대의 '에디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금방 이야기 했던 것을 바로 뒤집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밖에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금방 자신의 일을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편지를 기어코 보내고야만 행위는, 그녀의 모든 것을 던진 것에 다름아니었고, 그런 온몸의 던짐이 지금의 나에게 부족하다고 생각이 되어서다.
  주위의 사람들은 나에게 '너무 재지 마라', '눈이 너무 높아' 정도의 지나가듯 이야기를 던질 뿐이지만, 그들의 말이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는 것은, 나는 지금도 너무나 커져버린 생각때문에, 온몸을 던지지는 못한 채, 나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챙기고 최대한의 효과를 얻고자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평가당한다는 생각은 하지못한 채, 상대를 평가하려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써 그 용기 없음을 다만 합리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의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여,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어떤 잣대가 되었는 나의 행동을 재단하지 말자' 라는 생각, 다만 '행동하기 전에는 깊이 생각하고 움직이자' 라는 강령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15번의 편지를 썼다가 구겼더라도 한 번 더 써서 기어이 보내고야마는 '에디트'의 어쩔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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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르페 디엠 2008/12/18 13:4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와우~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이...포스팅을 여러개 쏟아내셨군요?^^
    츠바이크가 뉘인지는 모르겠으나 에디트를 살피기 위해 읽고싶어질 정도네요
    제가 지금 크리스마스 카드를 하나 사놓고 보낼까 말까 보낼까 말까 고민중이거든요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편지를 보내고야 마는 에디트...그녀의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카르페 디엠' 아닌가 싶은데요^^
    모르긴 몰라도 결이님도...언젠가는 에디트처럼 행동하시게 될겁니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생각할 여유따위는 주지도 않을 질풍같은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면 말이죠

    • 차이와결여 2008/12/18 14:18  address  modify / delete

      ^^
      잘 지내셨어요. '카르페 디엠'님?

      조금 일이 많아서요.. 푸우욱... 잠수 좀 타다 왔더니 올릴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네요. ^^

      크리스마스 카드.. 와.. 받는 분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나도 정성이 담긴 카드 받아 본지가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올해는 받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보내볼까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