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컬렉션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임홍빈 역, 문학사상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는 거지만,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매우 좋아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거의 맹신하는 수준이지요.
본래 제가 가진 성향이 한 번 믿으면 진짜로 배신당했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왠만한 일들은 '그럴 이유가 있겠거니...'하고 넘어가는 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만큼 믿음을 가지기도 쉽지 않은 것이겠죠.
암튼,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만은 분명한 믿음이 있고,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름 까탈스러운 저의 기준에 아마 몇 안되는 작가이지 않나 싶네요.
다른 나라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과 우리 나라에서 만큼은 아직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성이나 작품들에 대해 논란이 많은 가 봅니다. 작년에 <1Q84>의 판권을 놓고 '문학사상사'와 '문학동네'를 포함한 몇 몇 출판사들이 경쟁이 붙어서 판권료가 10억인가 얼마 인가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적잖이 실망을 했지만, 그건 하루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우리 나라 출판사들의 힘겨루기가 문제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문학동네'에서 판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이번에 출간된 <1Q84>를 보니 디자인부터 번역에 이르기까지 만족할 만한 수준이어서 나름 잘 된 일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요새, '문학사상사'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아무리 봐도 좋게만 봐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외려 저는 그런 부분들 때문에 하루키 책을 사기가 더 싫어졌다고나 할까요... 암튼 곁다리 이야기이니 더 깊게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튼, 저는 수시로 서점에 들르는 편이고, 서점에 들르면 당연히 몇몇 작가의 신간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둘러보곤 합니다. 그러다가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이 보이면 떠들러 보지도 않고 구입하는데요. 그 몇 안되는 작가 중에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입니다.
아마 이 책도 작년인가 사두었는데, 차분하게 읽으려고 곱게 모셔두었던 책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위에서 언급했던 이유로 '문학사상사'에서 발간했다는 것과 역자가 또 '임홍빈'이라는 것도 책을 덮어두게 되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여튼, 오랫동안 꽂아 두기만 했던 책을 얼마 전 지인 P양이 요즘 읽고 있다고 언급을 하였고, 마침 그때, 저는 P양을 기다리느라고 서점에 앉아서 계간 <문학동네>에 실린 '하루키 롱 인터뷰'를 읽은 터라 집에 돌아오자 마자 서가에 있던 책을 찾아 책장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드리자면 사실 제가 하루키를 처음 접한 것은 소설이었지만, 정말로 좋아하고 신뢰하게 되었던 것은 그의 유럽 체류기인 <먼 북소리>를 읽고 나서 였거든요.
대학교 때, 햇살이 비치는 도서관 서가에 기대어서 첫 장을 펼쳤던 그 책은 말 그대로 저 먼 곳 어디로 나를 이끄는 북소리가 들리는 듯 가슴에 들어왔고, 다 읽고 난 뒤에는 인간 하루키의 일면을 함께 한 것만 같은 생각까지 가지게 될 정도였습니다. 나도 하루키를 따라서 그리스 어느 섬에서 몇 달간 체류하면서 아침엔 샐러드를 만들어 식사를 하고 해변까지 조깅으로 나가서 겉옷을 훌훌 벗고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하다가 살을 까맣게 태우고 싶었지요.
하지만, 진정으로 하루키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자유롭고 평화로운 것만 같은 생활이 아니라 진솔함이 묻어나는 문체 때문이었습니다. 진솔하다 못해 편안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 문체, 독자들까지 배려하는 듯한 문체.
에세이에서 그의 글은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순 없는 것들이었지만 어렵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문장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듯 했습니다. 그의 그런 솔직하고 담백하지만 가볍지않은 문체를 동경해서 앞으로 나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어야겠다 라고 다짐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저의 지금의 태도와도 그리 다르지 않을 듯 하네요.
여튼, 그의 에세이가 편안함과 유머가 있는 글들이었듯이, 이번 책 <달리기를 말할 때~>역시 그런 편안함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평소 장거리 달리기를 꾸준히 연습하고 있고, 각종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여 무려 20회가 넘는 완주 기록을 가지고 있는 '하루키'가 자신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달리기로 대변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책인데요. 글쓰기라는 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촘촘하게 따라가면서 기록하는 과정인 것을 생각할 때, 하루키가 마라톤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루키' 자신 스스로는 별 감각이 없겠지만, 일반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자신에게 굉장히 철저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죠.
사실 말이 쉽지,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점검 결과에 맞추어 연습의 속도를 조절하고, 그렇게 몇 개월을 규칙적으로 연습한 뒤에야 마라톤에 참가할 수 있는 거라면 왠만한 사람들이 하기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아마 저에게 누가 직장도 관두고, 월급도 줄테니까 6개월을 꾸준히 연습해서 마라톤 대회를 완주해보라고 권유한다고 해도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여튼, 이 책에는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 30대였던 하루키가 50대에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체력에 대한 부분과 어찌할 수 없이 다가오는 나이의 그늘이, 그럼에도 달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하루키의 인생에 대한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요. 그 전에 읽었던 <우리는 언젠가 늙는다>라는 책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르게 나이 듦에 대한 철학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루키의 인생관이랄까요. 아님 책의 핵심 주제라고 할까요. 작가로서의 다짐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여하튼 이 책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아주 쉬운 몇 줄의 말이었습니다.
나는 올 겨울 세계의 어딘가에서 또 한 번 마라톤 풀코스 레이스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또 어딘가에서 트라이애슬론 레이스에 도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계절이 순환하고 해가 바뀌어간다. 나는 또 한 살을 먹고 아마도 또 하나의 소설을 써가게 될 것이다. 어쨌든 눈 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정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 ~ 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p.257~259)
문맥을 읽어야 하기에 좀 인용하다 보니 길어졌습니다만,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하루키는 그렇게 허투루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보기 드물게 사는 것과 쓰는 것이 일치하는 작가가 아닐까 합니다. 글을 쓰듯 삶을 살고, 삶을 살듯 글을 쓰는 게 아닐까..하는 개인적인 느낌이네요.
암튼, 이미 다른 에세이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번 책을 읽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최소한 믿을 수 있는 작가다. 그의 책이 문학성이 있든 없든지 간에...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결국, 저는 계간 <문학동네>를 구입하고 말았는데요. (요새 문학지를 사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무려 10년 만에 산 것이에요.. ㅎㅎㅎ) 무려 140페이지에 달하는 2박 3일간의 롱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확실히 요즘 세상에 문학지라는 것은 아무도 읽는 사람이 없는 것인지, 대학교 앞에 있는 큰 서점을 포함하여 무려 4군데의 서점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하나 남아 있는 것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보니, 글과는 다르게 어려운 이야기도 꽤 많이 하더군요. 당연히 작가이니까 소설을 많이 읽었겠거니 생각은 했었지만, 현대 일본 작가들과 미국 작가들에 대한 해박함도 놀라웠습니다. 거기다가 음악에 대한 조예도 남다르잖아요.. 이 사람...
여튼, 아직 다 못 읽었는데요. 마저 읽어야 겠습니다..
혹시라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하는 책은 <먼 북소리>,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라디오>인데요.
<먼 북소리>, <슬픈 외국어>는 의도적인 외유이긴 하지만 일본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느낄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로서의 우울함과 특별함이 묻어나는 감성적인 글이고, <무라카미 라디오>는 재기발랄한 '하루키'의 색다른 면을 맘껏 즐길수 있는 가벼운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이번 <1Q84>의 집필을 마치고 잡지 <an, an>에 다시 <무라카미 라디오>를 연재하고 있다는데요.. 우... 언제쯤 단행본으로 간행되고 언제쯤 번역될까요...
위 사진은 제가 보유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컬렉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거의 모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다 있지요. 몇 몇 겹치는 것들만 빼고요..
한 두 권쯤 안 읽은 것 같습니다.
네, 자랑질이랍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앞표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친절한 선배뉨 ㅋㅋ 영원히 철들지 않을~~
후후후. 진짜 좋지 않아요? 자신의 생각을 남김없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술술술 풀어 내기.
완전 초초 부러움.
이걸 읽으니까 막 달리고 싶어지더라구요. 저도 불필요한 모든 것을 떼어 버리고 사점에 도달해 그 평온함 마음을 느껴보고 싶기도 하고... 달려라, 달려!!
저는 나중에 뭐라고 묘비명을 쓰죠? 적어도 책을 사지만은 않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타향살이 ㄱㄱㅆ....ㅠ_ㅠ
으헝.
오.. 좀 괜찮은 것 같은데? "적어도 책을 사지만은 않았다.."
좀 멋짐.. 나중에 사용하지 않을거면 저에게 넘겨주세요.. ㅋㅋ
다른 말 필요없는 것 같아.. 나는 무조건 하루키가 좋아..그의 소설도, 그의 에세이도, 달리기도..
1949년 생이니까, 벌써 예순도 넘은 나이인데, 여전히 감각을 잃고 있지 않다는 것도.. 왠지 '영원히 철들지 않음'과 상통하는 것 같지 않우?? ㅋㅋㅋ
저도요,공감.
한동안은 하루키 소설이 다 그게 그것같아서 실망스러웠던 적도 있었어요.
번역의 문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글을 대충대충 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도 신간이 나오면 사보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호주 올림픽때 쓴 책 보고 다시 옛 정이 솟아났고^^
1Q84까지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아무렇게나 나오는 데로 쓰는 거 아냐,라는 의심이
가셨죠^^.(나오는 데로 쓰는 게 창작이잖아요 사실은.)
네덜란드 일간지와 한 인터뷰가 있는데,1Q84의 창작배경과 평소 글쓰기 습관 등,역시 되는대로 사는 작가가 아니라 절제하고 단련하고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믿음이 생기더군요.(그가 60대라는 사실이 서글퍼지기도 해요.-나도 그만큼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새벽에 글 쓴대요 이제.달리기도 살살, 하루 10키로미터씩 하고. 저녁 외출보다는 해지면 집에 있는 게 좋다는군요.)
소설 말고 본격 여행기를 좀 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저는.
특히 그가 쓴 일본여행기를 언젠간 볼 수 있을지. 바램입니다.
아~ 시드니 올림픽 취재한 거요?
저도 가지고 있어요.
원제는 <시드니!>인데, 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승리보다 소중한 것>이네요...역시 안 읽은 책 중에 한 권입니다.이번 기회에 읽어야 겠네요..
음.. 이제 10km밖에 안 뛰고 해가 진 뒤에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완전 슬프네요..
언젠간 하루키와도 이별을 해야하는 것이군요...
그렇네요..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네요..
새삼 느꼈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