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너무 한 것 아닌가요?

  어제 포스팅 했다시피,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어서 어제는 몇 달을 놀리고만 있었던 보일러도 살짝 가동해놓고, 긴 트레이닝 바지에 긴팔 후드T에 이불도 두 개나 덮고서 침대에 움크려 잠이 들었더랬습니다. 물론, 레인지에 20초간 데운 쌍화탕도 하나 마셔주었지요. 그런데, 이놈의 집은 안에 든 것은 없고, 넓디 넓은 공간에 맨 몸뚱이 하나다 보니까 썰렁한 기운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잤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운한 느낌도 아니더라구요.
  아마 그래서 좀더 꼼지락 거렸었는지, 오래간만에 여유있게 아침을 차려먹고 출근하겠다는 계획은 물건너가버렸고, 부리나케 씻고 나와서 편의점에서 대충 아침을 때웠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오전 감독을 했죠. 근데 날씨는 왜그리 좋던지요...
  바로 엊그제만 해도 서울에 물난리가 나서 야단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듯 하늘은 화창하기만 했습니다.. 하필... 오늘 말이지요..
  울며 겨자먹기로 자리에 앉아서 몇 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부장님'. 너무나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왔냐고, 잘 지냈느냐고 하시더군요..

  '아.. 뭔가 또 시키실 일이 있나부다.'
  '맞다. 자율학습 통계표 어쩌구가 있었지.. 안다구요.. 생각하고 있다구요.. 곧 만들게요..'

  "샘, 저번에 말했던 자율학습 통계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예, 부장님.. 그게,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서 시간을 좀더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예, 그렇게 하세요. 그게 참.. 쉽지가 않죠?"
  "네, 기왕 만드는 것 제대로 만들어야 쓰기에도 편하고 보기에도 편한..."
  "아..예, 그렇죠.. 그래도, 다음주 월요일부터는 어떻게..."
  "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장담은 못드리겠네요..."

  뭐 대충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은근히 밀려오는 부담감...ㅠ

  뭐 그런 통계표 하나 때문에 그리 고민이냐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이게, 그냥 워드프로그램으로 표 죽죽 만들어서 손으로 써넣는 것이 아니고요..
  역사상 최고의 프로그램이라 일컬어지는 그 이름도 유명한 '엑셀'을 가지고, 만드는 건데요..
  한달 별로 학생들의 이름과 야간자율학습 참여 요일을 표시하면 매일매일의 야자 시간이 기본적으로 기록되고 그날 참여 여부에 따라 또 시간을 빼서 일주일간의 총 몇 시간을 참여하였는지, 도합 한달에 몇 시간을 참여해야 하는데 실제 참여한 것은 몇 시간인지... 를 보여주는 워크시트를 만든다고 보시면 됩니다요..
  (엑셀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 것도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하나,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함수에, 시트에 어쩌고 저쩌고를  다 설명할 수가..ㅠㅠ)

  여튼, 그 정도만 만들려고 해도, 부족한 제실력으로는 한참일텐데, 변수가 너무나 많아요.ㅠㅠ
  아이들은 수시로 야자 요일을 바꾸기도 하고요. 안했다가 하기도 하고요. 했다가 안하기도 하고요..
  학교에서 운영하는 독서실에 들어가면 저녁 야자 말고 0교시 자율학습도 하고요. 토요일도 나오거든요...
  게다가 어떤달은 30일까지 있고, 다른 달은 31일까지 있고...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전부 계산해서 자동으로 합산되게 만들어야 하는 건데, 우리 부장님은 엑셀 함수 몇 개만 알면 뚝딱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듯....
  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못한다고 배째라고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기는 싫지만, 왠지 모르는 척 하면서 부려먹고 있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러면서 잠깐 나와서 담배 필때는 또 이러시더군요..

  "샘! 정말 만나는 사람 없는 거 맞죠?"
  "아, 예..."
  "내가 분당고에 있는 친구에게 진지하게 말해놨거든요. 일단은 미모가 되고.....능력있고... 여튼, 나중에 전화번호 드리면 꼭 만나셔야 합니다. 제가 곤란해져요....하하하."
  "아.. 저.. 그게...."

  음...
  호의로 그러시는 거겠죠? 호의까지 의심하면 제가 벌받는 거겠죠?
  허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호의를 보내주시는 부장님...
  진짜 호의를 베푸실 것이면, 황금같은 연휴에 일 좀 안하고 살 수 있게.. 최소한 부담감은 느끼지 않도록 압박이나 안해주셨음...ㅠㅠ 내가 언제 일 마무리 안하고 논 적있냐고요...ㅠㅠ 예?

  그렇게 오전을 속는 기분으로 우울하게 보내고 점심을 먹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먹었던 주먹밥이 또 말썽이었어요.
  이건 주먹밥인지, 돌밥인지..
  아이들은 맛있다고 선생님도 드시라고 '참치 주먹밥'이 젤 맛있다고 그러는데, 도저히 맛있게 먹질 못하겠더라구요. 결국 꾸역꾸역 하나를 먹긴 먹었는데, 아직도 소화가 되질 않습니다. 체한 것 처럼 속이 아파요...
  주먹밥마저.. 날... ㅠㅠ

  얼마 전에는 자동차 엔진 오일을 교환하기 위해 정비소에 갔었어요..
  그런데 막 작업을 시작하던 기사분이 그러시더군요.

  "어? 이거 비품인데요?"
  "예?"
  "엔진 클리너가 비품이에요. 정품을 쓰셔야죠..."
  "그럴리가 없는데, 좋은 거랬는데?"
  "이건, 보쉬..인데요.. 좀 싼거에요.."
  "ㄲ$ㅏ5ㅣ4ㅓ54ㅏㅗㅓ8ㅑ9ㅐ8$:^%$"
  "어? 엔진 오일도 좀 이상하네..."

  몇 달 전, 타이어를 교체하면서 엔진오일도 갈았었는데, 그때, 타이어 값이 어마어마 하게 나왔었거든요.
  좀 무리인 걸 알면서도 그래도 안전을 위한 거라는 생각에 최고급은 아니어도 중상급의 타이어로 교체하느라 70만원 가까운 돈을 들였고, 정비하는 차에 엔진오일도 같이 교환한 건데, 그 때 그 정비사가 제가 쓰던 것 보다 나은 것이 있다고 2만원이나 더 받고 갈았던 엔진오일이었어요..그냥 쓰던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70만원도 넘는 타이어를 교체하고, 이것 저것 도합 100만원 가까운 돈을 내야 하는데 설마 몇 만원을 속여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에요.
  정숙함을 생명으로 하는 세단, 그것도 LPG차에서 무슨 디젤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ㅠㅠ
  5년 밖에 안탔는데, 벌써 그러는 것인가... 내가 차를 너무 험하게 탓나... 하면서도 왠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아마도 엔진 오일이 좋지 않아서 그랬나봐요..
  엔진 오일을 교환하고 몇 일을 타고 다녔는데, 확실히 소음이 없더군요...이런 젠장...
  이건 뭐, 이제 와서 따질 수도 없고, 방심했던 나를 탓할 수밖에요..
  그런데, 왜 내가 나를 탓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ㅠㅠ
  기왕에 이렇게 된거, 그냥 잊는 수밖에요...
  ('기왕에 이렇게 된거'... 이게 요즘 유행어랍니다.. 수재민을 친히 찾아가셔서 남긴 MB어록)


  감기가 날 속이고,
  날씨가 날 비웃고,
  부장이 날 못살게하고,
  기사가 나를 낚시질하는...
  그 다음은 또 뭘까요..ㅠㅠ

  이거 뭐 무서워서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요...



  추신 : 좀 얄밉게 묘사하긴 했지만, 우리 부장님은 평소엔 '선비'라고 불리실 정도로 신사이신 분입니다. 다만 저를 너무 믿고 의지하시는 점이 좀.. ㅠㅠ 근데요, 부장님 제발 선은 잡지 말아주세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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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버제로 2010/09/24 00:1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부장님이 이걸 보시고 선을 안잡으시면 좋을텐데요;;

    그런 날이 있죠 해도해도 아무일도 안풀리는 날.
    최근에 그런날이 있었는데 기억이... 흠...
    제가 삽질 전문이라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요.ㅋ

    기운내세요!
    사는게 그런때도 있는거잖아요^^

    얼른 나으시고요~ 상쾌하게~~

    • 차이와결여 2010/09/24 09:55  address  modify / delete

      안타깝게도 부장님이 이곳에 들어올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되겠죠..ㅠㅠ

      사실은 투덜투덜하면서도 내심 이런 상황을 재밌어했답니다...

      이런 일이라도 없으면 제 인생은 너무 무미건조 할테니까요..ㅋㅋ

      그래도, 주먹밥은 좀 심했어요..ㅠㅠ

      그리고, 제발 분당고에는 마땅한 처자가 없기를 간곡히 바라고도 소망합니다...ㅠㅠㅠㅠㅠㅠ

  2. 우연 2010/09/24 01:4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속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너무 한 것 아닌가요?222222222

    • 차이와결여 2010/09/24 09:56  address  modify / delete

      ㅎㅎㅎ 이렇게까지 강력한 동의를 받으니...
      앞으로도 좀더 인생에 속아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네용..ㅋㅋ

  3. 클라리사 2010/09/24 07:2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1박하는 출장을 억지로 같이 갔더니, 2일째 출장지 직원이랑 저녁약속을 잡았더군요. 근데 업무와 관계없는 남자직원도 나왔었어요. 빨리 집에 가고싶은데 우씨 하면서도 접대성 저녁을 먹고 왔거든요. 근데 그게 출장을 빙자한 소개팅이었다는 거 ㅎ. 사귀는 사람 있다해도 안 믿던 그 상사, 아직도 싫다 진짜! (진짜 사귀던 사람 있어서 더 좌절) 힘내세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래서 컴퓨터는 못할 수록 편한 건데...

    • 차이와결여 2010/09/24 09:59  address  modify / delete

      우와..정말 그런일도 있는 것이군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좀 티격태격 대다가 우연한 인연으로 엮여서 결국은 어쩌구저쩌구... 하는 건데,
      역시 현실은 냉정하기만 하네요..ㅎㅎㅎㅎ

      저는, 컴퓨터를 못한다고 세상에 공표하고 싶어요..
      진짜 못하는데.. 우씨...

  4. 카르페디엠 2010/09/25 15:3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엑셀만 잘해도 유능해 보이는(?) 인재가 되는 법칙에서 학교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군요..^^
    그리고 부장님이 말씀하신 '일단 미모가 된다'는 말에 벌써 마음 설레하시는거 다~ 압니다.
    스윗 럽 스토리 포스트에서 사실은 엄청 연애하고 싶다고 고백도 하셨고.
    기왕 이렇게 된거, 떠밀리듯이 만나보시고 같이 엑셀 함수에 대해 토론하시면
    좋은 결과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차이와결여 2010/09/25 17:08  address  modify / delete

      우하하하하...

      '카르페디엠'님.. 진짜 재밌으세요. ㅋㅋㅋㅋ

      '일단 미모가 된다'는 말에 설렌다는 말에서 쪼끔 찔려하다가...

      '엑셀 함수'에 대해 토론 하라는 말을 읽고는 뒤로 넘어갈 뻔 했어요..

      우하하하하.. 잼나요. 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