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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이 해피엔딩> 책 표지


* 대책 없이 해피엔딩
* 씨네21 북스, 김연수, 김중혁


'...서로 죽이네, 살리네, 속았네, 당했네, 복수하네, 그랬겠지. 35세 미만의 시절에는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 같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정하고. 하지만 나이가 더 들면 그래 봐야, 아니 그렇기 때문에 막장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혼자 있을 때, 우린 그다지 아름답지도, 총명하지도 않으니까.
  대신에 우디 앨런의 주인공들은 항상 대화한다. 독백이라는 게 없다. 서로에게 맑고 밝고 투명하다는 얘기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라는 제목의 느낌 그대로다. 후한이 처음 본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주말을 함께 즐기자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섹스하자고 말하는 도입부를 보자. 원래 설정된 캐릭터대로 하자면 비키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만 하고, 크리스티나는 혼자서 후안을 따라가는 식으로 전개되는 게 옳다. 그런데 이들은 각자 자신의 캐릭터에 맞게 이 일에 대한 견해를 내놓는다. 토론의 결과, 모두들 만족시키지는 않지만 서로 타협을 보는 식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크리스티나는 여행과 섹스 모두 찬성, 비키는 여행은 찬성하지만 섹스는 반대, 후안은 원래 생각과 달리 한 사람과 섹스하는 일에 그냥 만족. 이런 문제도 서로 토론해서 합의를 보니 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과연 선진국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 김연수, 김중혁, <대책 없이 해피엔딩>, '서른 다섯이 지난 뒤 깨달았던 진리' (p.112~113)


  우앙..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원래 작은 일에 일희일비 하는 '차이와결여'는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다가도 남들이 잘 웃지 않는 부분에서 혼자 빵 터져서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기도 하고, 아이들 야자 시켜놓고 교탁에 앉아서 감독을 하며 책을 보다가 혼자 낄낄대면서 웃기도 하는 좋게 말하면 '감수성 풍부하고' 나쁘게 말하면 '푼수'같은 그런 사람이라서 감동도 잘하고 화도 잘내지만, 오늘은 이 글을 읽다가 빨갛게 표시해놓은 부분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네요. :)

  상대에게 '맑고 밝을'수 있다는 것은 언젠가부터 저의 삶의 '화두'가 되고 말았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언젠가 만났던 연인에게서 뜬금없이 들었던 이야기 때문인데요...
  술자리를 좋아하던 그녀와는 데이트의 목적도 술을 마시기 위한 자리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만났던 사람들(애인과 친구와 가족과 암튼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 중에서 나와 술을 가장 많이 마셨던 사람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술을 좋아하기도 하고 잘 마시기도 해서 언제나 제가 먼저 인사불성이 되고는 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와서는 참 미안한 것이 많은 사람이기도 한데, 암튼.
  어느 날인가도 거나하게 취한 자리에서 저에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이미 그땐 고딩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엄연한 직장인으로 만났던 관계였기 때문에 느닷없던 그녀의 물음에 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글쎄.."

  이미 나의 그런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녀는 술 잔을 따르더군요.  그리고는...

  "난 투명한 사람이 좋은데, 난 니가 좀더 맑았으면 좋겠어. 크리스탈처럼..."

  본래 책을 아주 즐겨읽던 그녀이긴 했지만, 평상시에는 잘 하지도 않던 단어들과 어조로 한 숨을 푹 쉬면서 던진 저 한 마디에 나는 깊은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도 저는 최대한 솔직하게 살고자 노력하던 때였고, 누구 앞에서도 가식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애인인 그녀 앞에서는 당연히 항상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지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황당할 수밖에요. 당황한 저는 그게 무슨 이야기냐고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 했지만, 고개를 숙이고 술 잔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속에 이미 그 이야기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있었고, 내가 어떻게 행동한다고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미 오랜 시간 끝에 그런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고, 그 사실을 나에게 통보했던 것이지요. 저는 무엇이 투명한 것이고, 무엇이 맑은 것인지 너무나 궁금하였지만, 더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뭐 그 이후로 더 물어볼 기회가 없이 헤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정확히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의 영향으로 언젠가부터 남들에게 맑고 투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게 되고 말았죠. 그녀는 아마도 나에게 이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모를 테지만... 뭐... 이제와서 안다고 해봐야 별 수 있는 것도 아니네요...

  여튼, 그 때 그녀의 말과 지금 제가 붉게 칠해놓은 말이 같은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결론을 책 속에서 발견한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더군다나 35세 미만의 시기에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니, 왠지, 지금은 제가 모든 것을 깨닫고 해탈이라도 한 듯 기쁩니다..

  <대책없이 해피엔딩>은 잡지 '씨네21'에 한 코너였던 칼럼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내용에 깊이가 있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한 편이 하나의 영화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도 아니어서 참으로 애매한 내용의 책 입니다만, 두 친구가 서로에게 '원 투 펀치'를 날리고 또 블로킹하는 듯한 글쓰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리고 두 작가(이자 친구)의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글쓰기와 말하기(?)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건 마치 '오샘''차이와결여'의 관계하고도 비슷한데요. 좀더 깊이있고 진지한 느낌의 거짓말 같은 건 절대로 못할 것 같은 '김연수'가 천연덕스럽게 우스겟소리를 날리는 모습과 재기발랄하고 톡톡튀는 듯한 그러나 가볍지만은 않은 '김중혁'의 글쓰기가 정말 잘 어우러져서 다음 칼럼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습니다.(당연히 재기발랄함을 담당하는 '차이와결여'입니다!)
  비록, 영화를 매개로한 소소한 일상이야기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때론,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번득이는 혜안을 발휘하여 '역시 쟁이들은 다르구나' 하는 느낌도 주는 책입니다.
  '김연수''김중혁'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강추!
  이제까지의 '김연수'의 소설들을 읽으시면서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셨다면, '김연수'의 반짝이는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실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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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ovis 2010/07/09 22:5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에게 또 한 권의 책을 추천하시는 건가요? ㅎㅎ
    '흙흙' ㅎㅎ 소리내어 읽으면서 한참 웃었습니다.
    정말 귀여워요 !

    대설주의보도 대 성공이었으니, 대책없이 해피앤딩도 한번 도전해봐야겠습니다 ㅎㅎ

    • 차이와결여 2010/07/11 01:17  address  modify / delete

      이번 책은 그냥 편안히 한 꼭지씩 읽으시면 될거에요..

      많은 것을 얻을 순 없겠지만, 그냥 친구 이야기 듣듯이 편하게요.. ^^

      소소한 재미가 있습니당.